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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부모와 다른 아이들 1

부모와 다른 아이들 1
  • 저자앤드루 솔로몬
  • 출판사열린책들
  • 출판년2016-08-06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1-11)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 듣기기능 TTS 지원(모바일에서만 이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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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은 차이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 대한 연구로 시작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으로 끝을 맺는다.” 「가디언」

    ‘인간성’의 확장에 대한 기념비적 탐구




    전미도서상 수상작이자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의 작가 앤드루 솔로몬이 기념비적인 새 책으로 돌아왔다. 집필에 10년이 걸린 이 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Far From The Tree』은 전미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었고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혁명적’인 책으로 찬사를 받았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캔들은 이 책을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삶 또한 인간의 권리”임을 선언한 “21세기의 심리학적 권리장전”으로 상찬한 바 있다. 이 책에서 앤드루 솔로몬은 예외적인 자녀를 키우면서 남다른 깨달음을 얻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00가구가 넘는 가족들을 상대로 4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솔로몬은 극단적인 도전에 직면한 보통 사람들에게서 감동적인 힘을 발견한다. 그는 예외적인 정체성을 가진 자녀―게이, 청각 장애인, 소인,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신동,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 범죄자가 된 아이, 트랜스젠더 등―를 둔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이러한 특징들을 마주치는 순간 ‘장애’ 혹은 ‘비정상’이라는 단어를 바로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며 흔히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특징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강력한 서사와 실증을 통해 이 책은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관점을 뿌리로부터 송두리째 전복시킨다.

    이전에도 이 책의 장을 구성한 농인이나 소인, 정신병, 범죄 같은 주제를 다룬 책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은 하나같이 이 책이 근본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과했다. 즉 개인의 특징적인 상태는 모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그리고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차이를 헤쳐 나가는 과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공통의 문제라는 점이다. 문제의 보편성을 인지하고 수많은 다양한 가족들이 서로의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그들을 괴롭혀 왔던 문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처음에 아이를 갖기로 하면서 상상했던 것과 다른 아이가 태어나는 문제다.

    솔로몬은 〈다양성〉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는 놀라운 명제를 제시한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갖가지 특징들은 본질적으로 별개이지만, 그로 인해 가족이 경험하는 차이는 거의 모든 장(章)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의 승리만큼이나 보편적이다. 지극히 독창적인 한 사상가의 보고서인 『부모와 다른 아이들』은 관대함과 수용, 인내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 근간에는 사랑이 모든 편견을 초월할 수 있다는 통찰이 존재한다. 이 결정적이고 계시적인 책은 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정의를 확장할 것이다.





    부모가 되는 것의 딜레마



    표면적으로 이 책은 ‘양육’에 관한 연구다. 남들과 ‘다른’ 아이를 키우는 수많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통해,우리는 특별한 아이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요구되는 덕성을 배우게 된다. 아이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부모를 닮는다. 국적과 언어, 인종과 피부색, 좀더 넓게는 종교와 문화까지 아이에게는 부모로부터 직접적으로 물려받는 특징이 있고, 솔로몬은 이러한 특징을 ‘수직적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한편 더 넓은 범위에서 아이는 부모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정체성, 즉 ‘수평적 정체성’이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비슷한 가운데 다르며, 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이것이 우리 안의 ‘다름’이며 ‘차이’이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범위 안에서 차이를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때때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우리들 누구도 이러한 차이에 대처하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부모라고 다를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아이는 내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거듭 깨우치듯이 부모는 아이가 될 수 있다. 아이의 아무리 특별한 특징이라도 부모는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나아가 바로 그 특징을 사랑하고 심지어 북돋을 수도 있다. 부모는 차이와 차별을 부질없는 것으로 돌리는 투쟁의 선구자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또 얼마나 비슷한가



    좀더 심층에서 이 책은 ‘다름’과 ‘차이’에 대한 연구다. 책의 전반부는 이른바 ‘장애’가 있는 아이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애’는 명백히 겉으로 드러난 ‘차이’, 혹은 이상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상은 ‘질병’일 뿐이지만, ‘장애’는 대개 즉시 식별되는 ‘차이’이며 그 극단적 이질성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솔로몬이 분명히 지적하듯이, 우리는 ‘차이’를 경멸한다. 극심한 차이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며, 정도가 심할 수록 ‘인간성’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장애인 또한 인간임을 안다. 다만 온전히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한 장애인의 숫자는 수십 만이었으며, 인구 비율을 고려했을 때 이것은 진실로 말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유대인 학살에 분노하는 만큼 이들의 죽음에 분노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차이’를 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장애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차이인 데 반해, 책 후반부의 차이들은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한층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장애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며, 그 비율이 상당히 적다는 데 안도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들이나 학교에 중화기를 난사해 수십 명을 살해한 아이들의 존재에 대해, 그 부모에 대해 비슷한 정도의 이해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들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좀더 근본적인 ‘차이’를 가졌다. 그리고 윤리적이며 존재론적인 난제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로 부모를 혼란스럽게 하며,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잘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보다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차이’의 시대, 다시 말해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말 그대로 동류이며 다양성은 종 존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특정 피부색이나 인종을 인간 이하로, 혹은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차이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이 우리가 문화로부터 습득한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온갖 비극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갖가지 차이들이 불과 수십 년 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흔쾌히 받아들여진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악하지 않으며, 흑인이 특별히 지능이 낮지도 않다. 우리는 그들의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차이’가 그들의 전부라기보다는 일부임을, 그러나 동시에 본질적인 부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깨닫는다.





    장애가 있는 아이, 그리고 부모



    이 책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 대해 유례없이 다양하고 방대한, 유용한 경험을 제공한다. 솔로몬은 매우 익숙한 장애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들 장애에 대해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인 특징 외에는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특정 장애가 초래한 불편을 모르며, 마땅히 제공되어야 할 편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장애를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문제의 핵심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어느 정도 인간으로 여길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 규정하고 배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제공되어야 마땅하다고 우리가 판단한 것을 준다. 즉, 그들은 원하고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며, 대신 필요하지 않은 혹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제공받는다. 정상인 사회는 호의를 빙자해서 그들의 삶을 제단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장애를 박멸하려 한다. 치료는 장애인의 삶을 지속시키는 범위를 넘어서 장애를 없애는 데 골몰한다. 정밀한 태아기 검사는 장애가 있는 아이가 아예 태어나지 않도록 막는다. 이 책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진술하듯이, 그들은 심지어 치료에 골몰하는 부모의 모습에서도 장애가 있는 자신을 사라지게 하려는 욕망을 본다. 우리의 호의는 어쩌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청각 장애인에게 수화를 금지하고 발화 교육만을 받도록 했던 시도는 명백히 우리의 불편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청각 장애인들이 언어 자체를 잃었고 삶이 망가졌다. 왜소인의 키를 늘려 정상인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 하지 연장술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시술이다. 이 시술을 받는 아동은 팔 다리 뼈가 산산조각 난 채로 수년 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정상인 부모는 그들의 아이가 정상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에게 스스로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운다. 그러나 그 결과 아이들은 한 왜소인의 표현처럼 ‘키 큰 난쟁이’가 된다.

    솔로몬은 인간성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다양한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중증 정신질환자들조차 매우 인간적일 수 있다. 그대로 방치했다면 짐승에 가까웠을 수 있었을 수많은 아이들이 용감하게 대처한 부모들 덕분에 인간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부모는 인간성 스펙트럼의 최외곽에 위치한 아이들에게 사회가 감히 제공할 엄두도 못 낼 수준의 보호와 치료 그리고 사랑을 제공한다. 이는 극도의 헌신과 희생이다. 우리는 이들 부모들의 경험을 통해 장애와 이상, 차이와 다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장성한 아이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보호시설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 끔찍해서, 혹은 그나마 아이를 맞길 보호시설을 도저히 찾지 못해서 절망하고 아이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부모도 있다. 부모는 위대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영속할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와 이 사회의 책임일 것이다.





    다른 ‘차이’들



    신동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히기도 했던 자폐인 템플 그랜딘이 지적했듯이, “천재도 비정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솔로몬은 특히 음악 분야의 신동(이를테면 중국의 유명한 피아노 천재 랑랑)과 그 부모를 다루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차이를 가진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 역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 만큼이나 어렵다. 어쩌면 더 어렵다. 어린 나이에 성인 못지 않은 성취를 보이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쉬 분별을 잃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의 보잘것 없는 성취에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지만, 신동의 부모는 욕심에 사로잡혔고 더 높은 성취를 향해 아이들을 잔인하게 내몰았다. 신동은 특정 영역에서 어른보다 뛰어난 성취를 보이지만 다른 대부분에서 어디까지나 아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그 ‘차이’를 우리들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다. 신동과 그 부모의 이야기는 실상 일반적인 가정과 상당히 유사하며,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며 공감할 만한 교훈을 던진다.



    강간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는 혼란 그 자체다. 이 아이들은 강간의 2차 피해인 동시에 강간이 행해졌음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증거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사랑을 느끼지만, 아이에게서 자신을 강간한 자의 눈을 본다. 아이의 손길에서 강간범의 손길을 떠올리고 소스라친다. 이는 극단적인 혼란이며 어머니들은 대체로 정신적으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한편으로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컨대 이러한 이질성은 사회적 수용의 부담보다 당사자의 부담이 압도적으로 크다. 많은 가족들이 이 혼돈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극복한 이들은 모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견고히 다짐으로써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수용 문제 역시 간단치 않다. 우리는 때로 강간범을 비난하기보다 피해자를 비난하며, 나아가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를 낙태하지 않는 결정에 분노한다. 이러한 아이의 존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장애가 그러하듯, 정상인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극단적인 차이는 수용되기보다는 박멸의 대상이 된다.



    범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이일 수 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아이의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적절한 양육을 행하지 못한 부모가 아이를 범죄자로 만든다고 여긴다. 그러나 범죄는 타고난 성향의 발현일 수 있다. 또한 가정 외부로부터 촉발된 정체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 솔로몬은 심지어 범죄성마저도 정체성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범죄를 이해하고 방지하는 관점에서 정체성 이론을 도입하려는 의도다. 아이의 범죄가 부모 탓일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시스템 탓이기도 하며, 이 책에서는 책임 경중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살펴본다. 즉, 아이가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가를 아이의 정체성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를테면 히스페닉계이며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는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상대적으로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산층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도 범죄를 저지른다. 클리볼드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전역에 극심한 충격을 안겼다. 13명을 사살하고 자살한 두 명의 범인은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전과도 없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학살을 계획했으며, 식당에 설치한 폭탄이 터지지 않은 덕에 계획한 만큼 사상자가 나지 않았다. 부모는 아들과 공범이 학교에서 왕따였으며 수시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왕따를 당했다고 해서 학교에 총기를 난사한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비극은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는 아들의 범죄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 간다. 일상적으로 비난과 적대를 마주친다. 그러나 그들 또한 그 끔찍한 범죄로 인해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다. 흔히 살던 곳을 떠나 성을 바꾸는 다른 범죄자 가족들과 달리,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시스템의 부조리가 초래한 비극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았다. 아들이 범죄자로 죽은 순간 사실상 부모의 삶도 끝났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기억은 남았으며 부모는 그 기억을 실체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삶을 지속한다.



    트랜스젠더

    비전형적 성 정체성도 비교적 관대히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몇몇 근본주의적 종교를 제외하면 게이를 사탄의 자손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교황청도 게이를 인정하고 포용했다. 세계적인 IT기업 애플의 CEO 팀 쿡이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은 그의 용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게이가 심지어 칭찬받을 수도 있는 정체성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스스로가 게이인 솔로몬에게 이 시대는 격세지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여전히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성 정체성들이 있다. 게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남성 게이는 자신이 남성임을 안다. 다만 동성애를 느낄 뿐이다.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정체성 사이의 불일치를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트랜스젠더와 게이는 차원이 다른 범주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이면서 게이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 게이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 따라서 그(그녀)는 겉으로 이성애자처럼 보인다. 반면 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겉으로 게이처럼 보일 것이다. 성 전환은 성별 불일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성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다. 성 관계는 불가능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 임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외양은 무척 어색할 수 있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비용 또한 엄청나며, 때로 치명적인 이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수술을 감행한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목숨보다 중요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하루를 살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이고자 한다. 그들의 괴로움, 욕망은 우리와 다르지 다. 다만 그들은 비극에 미스캐스팅된 주인공일 뿐이다.





    ‘차이’가 인도하는 더 인간적인 세상



    우리는 ‘차이’가 유발하는 경험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팔다리가 짧지 않은 이상 그로 인해 생길수 있는 의학적 문제들, 불편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때로 자폐증에 대해 꽤 낭만적인 관점을 보인다.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천사 같은 아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폐증은 다른 어떤 장애나 차이에 비해 단연 많은 자식 살해를 유발한다. 자폐증 아이는 부모를 미치게 만든다. 우리는 평소에 대체로 환영을 보거나 환청을 듣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헛된(幻)’ 것으로 치부되지만, 실제로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실제와 허상을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이 없는 것을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지만, 보고 듣는 것이 실제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는 없다. 미쳐서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다. 특정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도 뭔가 본질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으며 솔로몬은 정체성 차원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면서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소아성애도 정체성일 수 있다. 소아성애는 범죄가 아니다(우리는 이것을 정신병으로 본다). 성폭행이 범죄이며, 소아에게 행해졌다면 더욱 잔인한 범죄일 것이다. 솔로몬은 정체성이 옳고 늘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분병 옳고 그름의 경계에 선 정체성들이 있다. 다만 솔로몬은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론, 인간 세계의 불협화음을 다스릴 수 있는 도구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양하고 극단적인 ‘차이’는 비교적 드물게 나타난다.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없애 버리려 한다. 그러나 기형적인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 것도 사탄의 소행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달라 보이지만, 실은 거의 같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탄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출몰할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외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누군가조차 인간 이하로 취급할 때가 있다. 누구도 이러한 ‘상실’을 흡족하며 올바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극한 경계에 선 어떤 이들도 극도의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극단적으로 ‘다른’ 이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함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인류을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게 될 것이다. 솔로몬이 선언했듯이 ‘다양성’은, 극단적인 ‘차이’는 결과적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 지극히 대담한 명제를 담은 이 책은 이제 우리를 이전과는 다른, 좀더 ‘인간적’인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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